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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밍 PC, 대만 전방산업의 캐시카우가 될 수 있을까

대만(臺灣). 컴퓨터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국가 중에 하나입니다. 반도체 생산 분야 업계 1위의 TSMC, ASUS로부터 2007년 분리된 후 OEM 사업을 전담하고 있는 페가트론(Pegatron), 노트북 OEM 메이커 1,2위의 콴타 컴퓨터(Quanta Computer)와 컴팔(COMPAL), 아이폰 생산 업체로 유명한 홍하이(鴻海) 정밀, 오디오 및 네트워크 칩셋 제조로 유명한 Realtek, 그리고 디스플레이 패널 부문에서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는 AUO Optronics와 중저가 제품에서 약진중인 치메이 이노룩스(Chimei Innolux)까지, 오늘날 세계 시장에서 많은 수요를 보이는 품목들에는 이들 업체가 생산한 제품들이 하나 둘은 꼭 탑재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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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업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부품을 생산하여 소비자용 가전 및 컴퓨터를 제조하는 기업에 납품하거나, 팹리스 기업을 대신해 완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종 소비자를 직접 대하지 않고 기업에 B2B(Business-to-Business)로 부품을 납품하는 것을 주로 하는 업종을 후방산업(Rear Industry)이라고도 분류하는데요.

문제는 이런 후방산업의 경우, 자신 스스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전방산업(Front Industry)의 업체, 쉽게 말해 삼성이나 애플과 같은 기업들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나눠먹는 입장이기 때문에, 현재처럼 원청업체들이 혹독한 원가절감을 실시할 경우에는 매우 제한된 수준만의 이익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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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대부분이 후방산업에 속하는 대만 기업들의 경우 전방산업 업체들이 요구하는 납품단가에 맞추고, 자사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비용절감 노력을 강하게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고용의 최소화, 핵심인력 및 연구개발인력을 제외한 고용인력의 저임금화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인건비 절감을 위해 공장을 해외(특히 중국 본토)로 이전하면서 대만 내 고용인력의 규모까지 감소하게 되었는데요. 실제로 대만은 과거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이라 불리던 우리나라, 싱가포르, 홍콩의 최근 임금 상승률에 비하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임금 상승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대만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추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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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임금 정체현상이 대만 국민, 특히 젊은 층의 시위 등 사회 문제를 낳으면서 당국과 정치권, 기업에서 변화의 움직임도 조금씩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한 가지 아이템이 떠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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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게이밍 PC. 사실 게임용 PC라는 개념은 15~20년 전에도 있어왔던 것이지만, PC 카테고리의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게 된 것은 거의 2000년대 후반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거의 모든 PC 제조업체들이 완제품과 부품을 막론하고 이 카테고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 게이밍 PC는 종전의 PC 시장은 OEM 및 B2B 비중이 컸던 것과는 달리,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판매, 즉 B2C 비중이 높습니다(물론 PC방이나 Internet Cafe의 B2B 수요도 만만치 않습니다). 또, 사무용 PC가 많았던 과거 PC 시장과는 달리, 게이밍 용도이기 때문에 단가도 높고 마진에서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여기에 완제품 게이밍 PC 및 그래픽카드와 같은 게이밍용 PC 컴포넌트 시장은 이미 ASUS, MSI, GIGABYTE, ASRock, ACER, ZOTAC과 같은 대만 업체들이 높은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을뿐만 아니라, 마켓 리더(Market Leader)로서 높은 브랜드 가치를 보유하고 시장 주도권까지 쥐고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같은 ‘이미 삼성과 애플에 뺏긴’ 시장보다는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B2C, 고마진, 급속성장, 그러면서도 자국 업체들이 전방산업체로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있는 몇 안되는 시장인데, 이쯤 되면 정부 입장에서도 주목을 안 할 수는 없겠죠.


대만의 KOTRA와 유사한 중화민국대외무역개발협회(Taiwan External Trade Development Council, 이하 TAITRA)가 타이베이에서 열린 이번 컴퓨텍스 2017에 게이밍/VR 전시관을 별도로 할당한 것도 게이밍 PC 카테고리가 단지 업계의 트렌드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셈입니다. 애초에 TAITRA부터가 대만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단체인 만큼, 게이밍/VR에 별도로 전시관을 할당한 데에는 대만 정부의 의중 또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만에게 있어서 게이밍 PC 시장이 한국이 스마트폰/태블릿PC 시장으로부터 벌어가는 것처럼 캐시카우(Cash Cow)가 되어주리라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대만이 게이밍 PC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에 대한 기술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습니다.

PC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갖고 있다면, 게이밍 PC의 핵심은 성능이고, 이 성능을 이끌어내는 핵심 부품은 CPU, GPU, RAM, 저장장치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PC와 게이밍 PC를 막론하고, 이 네 가지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 중 대만 기업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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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U는 잘 아시는 것처럼 인텔과 AMD가 오랫동안 과점해 온 시장이고, 그래픽카드의 경우 ASUS, MSI, GIGABYTE 등 대만 기업은 오버클럭과 전원부, 쿨링 등 부차적인 것만을 제조하며 그래픽카드의 핵심 부품인 GPU와 VRAM은 각각 NVIDIA/AMD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RAM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핵심 모듈을 의존하고 있으며 대만 기업이 하는 것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수율 선별과 패키징, 테스트, 그리고 최근 대두되는 LED를 내장하는 것 정도에 불과합니다.

저장장치 또한 사정은 비슷합니다. SSD의 핵심 부품인 NAND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부분 의존하며, SSD 컨트롤러 또한 마벨/샌드포스 등 타국 업체에 의존하는 실정입니다. HDD야 점점 사양 산업이 되어 가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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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메인보드의 경우 상당한 수준의 수직계열화를 이뤄냈습니다만, 역시 메인보드라는 제품 자체의 특성상 CPU를 제조하는 인텔/AMD의 플랫폼 정책에 끌려갈 수 밖에 없어 제조업체의 자율성은 상당히 낮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시장의 삼성전자가 AP, RAM, 통신 모듈,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모든 것을 수직계열화하고 OS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완벽한 통제를 이룩했다는 점에 비교해 본다면 대만 업체들의 ‘진짜’ 시장 지배력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대만 기업은 게이밍 PC 시장을 주도하고는 있으나,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모래성을 높이 쌓은 듯한 모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그냥 을도 아니고 ‘슈퍼 을’ 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만 기업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고마진을 창출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어느 것 하나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인텔, AMD, NVIDIA, 삼성전자 DS부문이나 SK하이닉스를 인수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드는 데다가 해당 기업이 위치한 국가의 정부가 적극적으로 막을 것이고, 독자적으로 개발하자니 기술적 난이도와 필요자금이 천문학적일 뿐더러, 이미 기존 업체들이 설치한 기술 장벽이 너무 많아 시장에 안착할 수 있는지조차도 불투명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아예 원천기술 접근을 포기하고 응용기술 및 브랜드 가치에 투자하는 방안도 있습니다만, 전자제품은 근본적으로 기술과 성능이 제품경쟁력의 핵심인 만큼 이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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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최근 도시바의 반도체 부문 매각에 홍하이 그룹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미-일 기업 연합에 우선권을 준다는 얘기도 있어 대만 기업에 반도체 사업부문이 매각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묘수를 대만 기업과 정부가 찾을 수 있느냐가 향후 게이밍 PC 시장의 모습을 결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대만의 미래에도 조금은 영향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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